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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9-27 17:05
[언론기사] [함께하는품] 시드니, 용산, 그리고 밀양 - 그린 밴과 잭 먼데이의 이야기 (김현우 상임연구원)
 글쓴이 : 에정센…
조회 : 11,256  

▲ 1989년의 잭 먼데이


시드니, 용산, 그리고 밀양 - 그린 밴과 잭 먼데이의 이야기


O 잭 먼데이라는 인물

잭 먼데이(Jack Mundey)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한번 자세히 소개할 필요가 있겠다. 1929년에 오스트레일리아 퀸즈랜드에서 태어났으니 지금 팔순이 훌쩍 넘은 나이지만, 여전히 정정히 활동을 하고 있는 전설적인 오스트레일리아 노동운동가다. 어려서부터 고분고분한 성격은 아니었던 모양이어서, 초등학교 때 권위주의적 교육방식이 싫어서 학교에서 도망 나왔고, 19살이 된 1950년대 초반에 금속노동자가 되었다. 금속노조자연맹과 건설노조자연맹이 통합하면서 건설노동자가 되었는데, 중공업에 종사할 때부터 작업장의 안전과 노동조건 결핍에 문제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1953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 공산당에 입당하기도 했다.
1960년대에 먼데이는 선구적인 조합원으로서, 건설 현장의 안전 향상은 물론 여성주의, 동성애 권리, 국제 정치 등 더 넓은 사회 이슈들에 관심을 가졌고, 이 모든 것들이 노동조합운동의 목표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1968년에 뉴사우스웨일즈(NSW) 지역의 건설노동자연맹(BLF)의 총장으로 선출되었고, 이것이 역사적인 “그린 밴”을 이끄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린 밴(Green Ban)은 “녹색 금지”, 즉 환경을 파괴하는 활동을 금지한다는 뜻으로, 노동조합원의 권리를 위한 작업장 행동을 뜻하는 “블랙 밴(Black Ban, 조합원 명부를 검은 잉크로 작성한데서 나온 명칭)”과 대비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최초의 그린 밴은 1971년에 시드니의 부둣가 갯벌 근처의 켈리 덤불숲(Kelly’s Bush)이 개발될 위기에 처하자, 인근 주민들과 지역사회 단체들이 노조에 도움을 청하면서 시작되었다. 지방의회, 법원, 언론사 등을 찾아다니며 호소했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한 지역 활동가 몇 명이 BLF 사무실을 찾았고, 먼데이를 비롯한 노조 운동가들은 공개 회합을 열자고 제안했다. 6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열띤 토론이 벌어졌고, 지역 주민들은 BLF의 조합원들에게 켈리 숲 개발 공사를 거부하고 함께 공사를 저지하는 행동을 공식적으로 요청하게 된다.
공사를 맡은 건설회사인 A. V. 제닝스는 비조합원 노동자들을 써서 켈리 숲 공사를 진행하겠다고 발표했지만, 북부 시드니에서 제닝스의 사무실 건설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건설 노동자들은 제닝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만약 켈리 숲에서 건설 공사를 하려 한다면, 나무 한그루만 베어지더라도 이 건물은 반쯤만 지어진 그대로 켈리 숲의 기념비로서 그냥 남아있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이는 제닝스뿐 아니라 다른 부동산 건설업자들에게도 경고로 다가왔다.
이 첫 그린 밴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제닝스가 물러난 켈리 숲은 여전히 공개 공유지로 남아 있다. 그 때부터 비슷한 위기에 닥친 지역사회와 환경운동들은 NSW BLF를 찾아와 그린 밴을 요청하게 되었다. 하지만 노조는 대중 회합을 통한 대중적 관심과 지지가 충분히 뒷받침 될 때만 그린 밴은 가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지역사회와 결합하지 않는 자의적 운동은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 그린밴 지지시위를 그린 벽화

건설 노동자들이 그린 밴 요청에 선뜻 응한 것이 의외로울 수도 있지만, 아마도 잭 먼데이를 비롯한 노조 활동가들의 관심과 의식이 이미 상당히 넓고 높았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 혹자들은 노조가 고용된 임무를 위배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린 밴 운동의 지도자들은 수익성만을 위해 지역공동체를 파괴하며 고층 건물과 호화 주택을 짓는 대신 유치원, 병원, 노인을 위한 주택 등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건물들이 더 만들어져야 하며 유서깊은 건물과 공유 공지, 자연 환경은 보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먼데이는 이렇게 썼다.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하게 될 말은 무엇일까요? 완전 고용이라는 이름으로 시드니를 파괴했다고? 아닙니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유용한 건물들을 건설하기를 원합니다.” 시드니의 한 여성은 노조에게 편지를 보냈다. “저는 노조는 좋아하지 않지만, 당신들과 당신의 노조가 한 일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사기업의 사람들이라면 바보 같은 파괴를 당신들처럼 막을 수 없었을 겁니다. 우리 같은 이들을 위해 행동해 준 것에 감사드려요.”
그린 밴은 1974년까지 42회나 펼쳐졌고, 시드니의 유서 깊은 록스(the Rocks) 지역, 센테니얼 파크, 보태니컬 가든 등이 쇼핑센터나 주차장이 되는 대신 보전되어, 지역공동체가 유지되면서도 오히려 시드니의 관광명소와 휴식의 장소를 제공하고 있다. 이 운동은 오스트레일리아 정부의 건설과 도로 정책의 패러다임도 일정하게 바꾸어서 유산보호법과 환경보호및평가법이 제정되는 결과도 낳았다.

O 그린 밴의 반향

그러나 건설자본의 이윤 만들기를 방해할 수밖에 없는 그린 밴이 순탄하게 진행되었을 리가 없다. 운동 과정에서 건설업자의 로비를 뒤에 업은 보수 정치인들, 경찰, 언론들의 방해와 협박이 줄을 이었다. 심지어 개발 반대 운동에 적극적으로 결합하던 주아니타 닐슨이라는 여성 언론인은 1975년에 실종되었는데 건설업자들이 고용한 이들에게 납치되어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결국 1974년에 그린 밴 운동이 막을 내리게 된 것도, NSW의 정치인들의 압력을 받은 연방 BLF의 지도자 노엄 갤러거가 먼데이 등 NSW 지부의 활동가들을 제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갤러거는 건설업자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 록스 지역에서 끌려 나오는 먼데이

어쨌든 그린 밴은 시드니뿐만 아니라 오스트레일리아를 넘어 세계적으로도 큰 반향을 남겼다. 먼데이가 노동조합의 직위에서 쫓겨난 이후에도 다른 노조에서 비슷한 운동들이 이어졌고, 1976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철도노조와 총연맹(ACTU)까지 우라늄 채굴과 운송 반대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지역사회도, 노동조합도, 건설업자도, 정부도 모두 그린 밴 이전과 같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린 밴 운동은 ‘녹색(Green)’이라는 말이 국제적인 무대에서 정치적 의미를 갖게 만든 계기이기도 했다. 마침 그린 밴이 펼쳐지고 있을 즈음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했던 독일의 페트라 켈리가 노동운동이 환경운동과 연대하고 있는 상황과 함께 ‘녹색’이라는 용어가 사용되는 방식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켈리는 1979년 독일 녹색당 창당의 주역이 되었고, 그린 밴이 환경운동의 가능성을 넓히고 새로운 차원을 가져다주었다고 인정했다.
이후에도 잭 먼데이는 개발 문제에 대한 관심과 활동을 멈추지 않았고, 지금은 NSW의 역사보전재단의 의장도 맡고 있다. 그에 대한 시드니 시민들과 오스트레일리아 노동운동가들의 기억과 존중은 여전히 큰 것이어서, 오스트레일리아의 CFMEU(건설임업광업에너지노조)에서 조직활동가로 일하는 고직만 선배도 몇 해 전 한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먼데이에 대한 높은 존경심을 피력한 기억이 있다.

O 용산 철거민들과의 연대

그런데 <오마이뉴스> 2009년 1월 29일자 기사는 먼데이가 한국의 용산 철거민에게 전하는 특별한 메시지를 소개한 바 있다. 먼데이가 용산참사 희생자들에게 자필로 위로 편지를 쓴 것인데, 여기서 그는 용산 투쟁의 고귀함에 대한 환기와 희생자에 대한 위로의 말, 그리고 다음 세대들이 이를 기억할 것이라는 격려를 전하고 있다. 1970년대 그린 밴 운동 과정에서 그와 동료들이 맞닥뜨렸던 상황을 생각하면, 용산 참사에서 당시의 시드니를 떠올린 것은 놀랍지만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인터뷰 기사를 조금 더 옮겨보면 이렇다. “시위가 격렬해지면 대응 수위가 높아지는 건 마찬가지다. 그런데 1970년대 시드니는 경찰의 곤봉보다 건설개발업체가 고용한 용역들의 행패가 더 견디기 힘들었다. 그들은 정말 끔찍한 악마들이었다.” “깡패 수준이 아니라 실제로 깡패들이었다. 그들은 철거대상자들과 건설노조 소속 시위대들에게도 아주 심한 행패를 부렸다. 물론 건설개발업자의 사주를 받은 로봇 같은 행동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나중엔 그것조차 미워졌다.” “알고 보면 한국이나 호주에서만 발생한 비극이 아니었다. 개발 붐이 한창이던 시대의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존 스타인벡이 쓴 <분노의 포도>에 나오는 스토리도 똑같지 않은가. 문제는 호주와 미국에선 오래 전의 역사가 됐는데 한국에서는 현재형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개발 저지의 투쟁 막바지에서 완력에 의해 강제로 들려나가는 먼데이의 사진은 정말 남의 일 같지가 않다. 먼데이에게도 이 땅의 사람들이 그렇게 여겨졌을 것이다.

▲ 시드니 두개의문 영화표와 광고 (미디어참세상)

2012년 10월에는 용산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이 시드니에서 300여명의 관객 앞에서 성황리에 상영되었다고 한다. 우연치 않게도 용산 참사 사건의 담당검사를 맡았던 이가 시드니 주재 한국 총영사로 가 있으면서 이 상영회를 두고 불미스러운 일도 발생했던 모양인데, 어쨌든 용산 참사에 대한 먼데이의 관심과 한국의 운동에 대한 애정도 다시 한번 시드니 교민 사회와 CFMEU를 위시한 노조운동에도 공유되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O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한 영남 건설노조

그린 밴은 어떻게 가능했고,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다른 나라의 운동을 그대로 수입해서 우리도 해보자고 다그쳐서 무슨 일이 될 리는 없다. 오스트레일리아 특히 NSW 지역의 노동운동과 지역사회 운동의 저변도 한국 보다 훨씬 넓었던 듯 하고, 건설노동자들의 처지나 사회적 조건도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용산뿐만 아니라 청계천, 상계동, 사당동에서 사람들이 밀려날 때, 막무가내 4대강 공사와 새만금 공사가 진행될 때, 이를 빈민운동가나 환경운동가들뿐 아니라 공사에 직접 투입되고 장비를 움직이는 노동자와 그들의 노동조합이 함께 할 수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앞으로도 그런 장면을 꿈꾸는 것은 부질없는 일일까?
자꾸 이야기를 꺼내고 희망하기를 반복해야 꿈은 기획이 되고 실험이 될 것이다. 마침 지난 7월 영남권 건설노동자들로부터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민주노총 부산·울산·대구 및 경남·경북본부, 전국건설노동조합 부산·울산·경남본부와 대구·경북본부는 “영남권에서 일하는 건설 노동자들은 밀양 송전탑 공사를 거부한다”고 밝히는 기자회견을 가졌던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분명하다. 주민의 생명권과 생존권, 재산권 등을 송두리째 빼앗고 주민을 전력난의 주범으로 내모는 한국전력공사의 송전탑 공사에 협력할 수 없으며, 밀양 주민들과 연대해 공사가 강행되지 않도록 함께 투쟁할 것이라는 말이다.
이 행동을 함께 할 수 있는 건설노동자들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그린 밴의 사례만큼 유효한 공사 저지 운동으로 펼쳐질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러나 이것이 한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농성하던 송전탑에 밀양 주민들이 방문하고, 거꾸로 평택과 울산의 금속노조 조합원들이 밀양의 송전탑을 방문하여 교류를 확보한 일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이들이 서로 만나고 연대를 축적할 때, 무엇이 진정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이고 생산인지, 자본의 흐름을 극복할 연대의 흐름은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 보이기 시작할 것 같다.


/김현우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

* 이 글은 평등사회노동교육원의 [함께하는 품] 제8호에도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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