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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4-27 02:06
[언론기사] [오마이뉴스] [기획- 메콩의 햇빛⑧] 라오스 소년들의 초고속 성장기
 글쓴이 : 에정센…
조회 : 9,874  

마흔여섯 살 할머니, 스물두 살 아기아빠
[기획- 메콩의 햇빛⑧] 라오스 소년들의 초고속 성장기


오마이뉴스는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착한여행과 함께 라오스 산간학교에 햇빛발전을 지원하는 공동캠페인을 진행합니다.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는 2009년부터 꾸준히 라오스 산간학교에 태양광을 지원해 주고 있습니다. 특히 소수민족이 사는 메콩강 유역 산간 학교 학생들은 하루에 10km이상 걸어서 학교에 가기도 합니다. 이들 산간학교 기숙사에 지원되는 태양광 시스템은 아이들이 안정적인 학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줍니다. 라오스 산간학교 아이들과 함께 만드는 햇볕발전 이야기에 오마이뉴스 독자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말]

'시간이 머무는 곳'이 라오스라고? 내 책 <싸바이디 라오스>(안녕하세요 라오스)의 부제목이다. 어릴 적 백일장에서 장려상을 한번 타 본 것 외에 글 쓰는 데 재주가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나였기에 책 제목도 출판사에서 지어주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욕망이 멈추는 곳'이니 '마지막 에덴'이니 하는 것처럼 뭔가 라오스의 이미지를 어렴풋한 것으로만 박제화 시키는데 일조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그게 정말 현실이 됐다. 꿈틀대는 욕망이, 쏜살같은 시간이 라오스라고 해서 절대 머물지 않는다.

쏨분(완전하다는 뜻)을 만난 건 그 다음 날이었다. 여느 금요일 저녁처럼 아짠 쌩짠네 가게 앞에서 복권을 팔고 있는 아짠들 뒤에서 나도 의자를 하나 놓고 앉아서는 그냥 놀고 있었다. 그런데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던 웬 아가씨가 아는 척을 했다.

"아짠 씰리펀이군요! 저 기억하세요? 저 쏨분 동생이에요."

아, 그리고 보니 5년 전 중학생 때 얼굴이 조금 남아있다. 그동안 1년에 두어 번씩은 꼭 싸이냐부리를 찾았어도 한 번도 볼 수 없었는데. 반가움에 뭐라고 인사해야할지 더듬거리고 있는데 동생이 예전과 다름없이 엄청 빠른 속도로 말했다.

"오빠가 아짠을 많이 보고 싶어 해요, 내일 언니가 결혼하는 잔치가 있어요, 신랑 보러 꼭 오세요."

쏨분은 몽(Hmong)족이다. 라오스 소수민족 중에 가장 유명하다. 1960, 70년대 미국이 라오스에서 비밀전쟁을 수행할 때 몽족 일부 집단이 중앙정보부(CIA)에 부역해 사회주의정부가 수립된 이후 망명할 수밖에 없었던 아픈 역사가 있다. 미국은 소수 정치적으로 이용가치가 있는 인사만 망명을 허용하고 집단 망명을 거부해 이들을 라오스와 타이의 국경 오지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몽족이 유명해진 건 이들이 미국으로 망명해 영어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세계에 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 망명을 허용 받은 목소리 큰 소수는 자신들의 적 사회주의 라오스 정부를 '자유의 목소리Voice of Freedom'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미국에 선택받지 못하고) 타이 국경지대에 남은 몽족들의 귀향을 라오스 정부가 막고 있다고, 라오스 내에 있는 몽족들은 기독교를 믿고 있는데 라오스 정부가 종교의 자유를 탄압한다고 말이다.

꼴찌 반 반장, 아주 멋진 대장이었던 쏨분
   

  열심히 오토바이 모토를 수리하고 있는 쏨분과 친구.
ⓒ 이영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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쏨분을 만난 건 5년 전 2008년 2월이었다. 미술 교사인 아짠 프안쿠완에게 싸이냐부리 지도를 그려줄 학생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을 했더니 망설임 없이 바로 쏨분을 데려왔다. 아짠은 쏨분이 지난해 싸이냐부리 도(道) 미술대회에서 1등을 했다면서 무척 자랑스러운 표정이었다. 사실 쏨분의 얼굴을 처음 본 건 2007년 7월이었다. 그때 싸이냐부리에서 라오스 전국생활체전이 열렸다. 우리학교가 체전 개막식에서 타악 연주를 맡게 되어 한 달 가까이 학생 열다섯 명이 맹연습을 했었다. 그때 이미 열여섯 살로 키가 훌쩍 컸던 쏨분은 거기에서 제일 무거운 큰 북을 맡았다.

쏨분은 다재다능했다.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은 물론이고 컴퓨터도 잘 다뤘다. 음악 편집 프로그램을 내 노트북에 깔고 하루 종일 음악과 음향을 편집하기를 좋아했다. 어린이문화센터에서 작은 선생 노릇도 했고 싸이냐부리 라디오 방송국에서 기사를 읽고 녹음하는 자원활동에도 열심이었다. 자전거도 용접해 직접 만든 것을 타고 다녔다. 그걸로 엑스트림스포츠에서나 가끔 볼 수 있었던 아슬아슬한 묘기를 선보여주기도 했다. 쏨분은 3학년 4반 반장이기도 했다. 4반은 공부로는 꼴찌 반이긴 했지만 멋진 대장을 반장으로 둬서 그런지 학생들 표정이 제일 활기차고 시원시원했다. 쏨분은 또 우리학교 청년단 학생대표이기도 했다. 라오스에서 '대표'라는 것은 그야말로 자신이 대리하는 사람들을 위해 의사표시를 해야 하는 중요한 위치다. 반장, 학생 대표는 학생들의 유급과 졸업 등을 결정하는 성적사정회의에도 참석할 정도다. 

그런데 바로 그런 학생대표인 쏨분이 유급을 많이 했다. 라오스에서 열여섯, 열일곱(열여섯 살 열한 달째여도 라오스에선 열여섯 살이라고 한다. 그러니 우리와는 많으면 세 살, 보통 두 살은 차이가 난다)이면 대학에 들어갈 나이다. 쏨분은 우리로 치면 대학교 들어갈 나이에 중학교 2학년이었던 거다. 이유는 저수지에서 놀다가 떨어져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1년을 쉬었다는 것인데 그래도 몇 년 차이가 나는 것은 성적도 성적이려니와 도저히 진급이나 졸업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자주 학교를 빠졌기 때문이란다.

그 당시엔 쏨분과 쏨분의 가족 전체가 학교 다니는 것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두고 그들이 덜 근대화된 소수민족인 몽족이어서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몽족이어서가 아니라 그냥 대부분의 라오스 사람들이나 어린 학생들이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 위해서 학교를 간다고 생각하는 것이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열여덟 살 아내와 두살 된 아기   

여기 라오족 사람들은 보통 쏨분을 '쏨분리'라고 성까지 함께 부른다. 라오스어를 모어처럼 잘 하는 동생도 그들처럼 쏨분을 쏨분리로 부른다. 그런 쏨분의 성이 나와 똑같은(?) '리'씨라는 것도 라오족인 아짠 프안쿠완이 알려주었다. 나는 쏨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고자 하는 아짠의 뜻을 이어 또, 몽고반점을 가지고 태어난 같은 가족으로서(그런데 여기 지배적인 민족인 라오족 아기들 엉덩이에도 파란 몽고반점이 있다. 그럼 라오족도 우리와 혈통이 가까운 가족인가 모를 일이다) 우리처럼 성은 떼고 쏨분이라고만 부른다.

"쏨분! 어어……, 얼굴이 너무 말랐네!"

4년 만에 다시 만나 처음 한 인사가 고작 이거였다. 그동안 쌓인 그리움과 반가움이 뒤섞여 그렇잖아도 어눌한 내 라오스어는 더 빈곤하기만 하다. 쏨분도 특유의 부끄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렇잖아도 아침부터 잔치를 하느라 술로 불콰해진 얼굴을 더욱 붉힌다.

"아짠, 제 아들이에요! 이 사람은 제 아내구요."

  쏨분의 아내와 아기, 그리고 장모의 모습.
ⓒ 이영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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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가 아기를 안고 나오자 쏨분은 아들을 먼저 소개했다. 뒤따라 쏨분의 아내 '비'가 나왔다. 장모는 마흔 여섯, 비는 열여덟, 아기는 이제 두살이 되었다. 비는 위양짠에서 만났단다. 친정은 싸이냐부리 남쪽 빡라이(Paklay)인데 같은 몽족이다.

쏨분은 친구들 접대하랴, 곧 누이가 시댁으로 타고 갈 차 챙기랴 부산하다. 그 와중에도 내게 따로 음식을 차려주고 지난 이야기, 가족들 안부를 들려주었다. 첫째 누나는 내가 귀국하던 해에 시집을 갔고, 오늘 둘째 누나가 시집가는 거란다. 결혼식은 아니고 결혼식 한 달 전에 친정에서 시댁으로 들어가는 잔치를 하는 거라고. 자형은 미엔(Mien)족으로 여기서 큰 가게를 하고 있는데 누나보다는 세 살, 자기보다도 두 살이 어린 동생이라고 웃었다.  

쏨분의 친구들 두엇이 얼굴이 익다 싶었는데 영락 없이 내게 다가와 인사를 한다. 그때 쏨분과 항상 어울려 다니던 그 친구들이다. 쏨분보다 서너 살 어리지만 그들도 마찬가지로 진짜 건장한 청년이 다됐다. 어려도 쏨분보다 수줍음이 덜한 친구들은 예전 쏨분과 띠분(Pétanque, 프랑스에서 유래한 큰 쇠구슬치기 놀이)을 할 때, 새로 짓는 교사(校舍)건축 일을 도와줄 때 내가 찍어 준 사진 이야기 등을 하며 아주 요령 있게 얼음 넣은 잔에 거품도 나지 않게 비야라오를 따라줬다.

그들과의 옛 기억에 눈이 점점 취하는데 또 한 청년이 저를 기억하겠냐며 다가왔다. 아, 시장에서 빠투(타이산 고도리)를 팔던 소년이다. 그때 어린 소년이 노점을 보고 있는 게 안쓰럽기도 해 사진을 찍어 선물했던 게 긴(?) 인연의 시작이 되었다. 함께 시장에서 일하던 어머니와도 친해져서 귀국 이후에도 싸이냐부리에 가면 꼭 시장에 가고 꼭 소년의 어머니를 만나 소년의 안부를 물었다. 어머니가 키도 크고 이젠 청년이 다되었다고 자랑했는데. 정말 그렇구나!

쏨분 증조할머니 사진이 말해주는 몽족의 비밀

누나와 자형이 드디어 시댁으로 떠났다. 여태 아무렇지도 않게 잔치를 챙기던 쏨분 어머니가 부엌에 웅크리고 앉아 눈물을 훔치셨다. 이를 본 쏨분의 장모가 똑같이 쪼그리고 앉아 안아준다. 시집가는 누나보다 어머니들의 마음에 더 눈물겨워 목이 메일 것 같은데 쏨분이 두툼한 사진첩을 가지고 나왔다. 주로 어디 놀러가서 찍은 사진이거나 졸업, 결혼 등 기념사진이 대부분이었다. 오히려 쏨분의 일상의 모습을 담은 내 사진들이 특이해 보일 정도였다.

그런데 내게 정말 특이해 보이는 사진이 눈에 띄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미국과 영국에 사는 친척들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내가 그 친척들이 거기에 언제 가게 되었냐고 물었고 쏨분은 예상대로 1975년이라고 분명하게 이야기했다.

"와! 이 사진 굉장히 오래된 것 같은데, 누구셔?"
"증조할머니, 제 증조할머니세요."

  1940-1950 사이에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쏨분 증조할머니 사진, 사진 뒤에는 베트남 문자와 비슷한 몽족 문자가 적혀 있다.
ⓒ 이영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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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그때 연세가 여든 일곱이셨단다. 먼지 낀 사진첩에서 꺼내 자세히 보려는데 뒤에 무슨 문자가 적혀 있었다. 쏨분도 뒤에 뭔가 씌어있는지 몰랐는지 깜짝 놀란다. 무슨 알파벳인데 성조 표시인지 문자 자체인지 모를 부호들이 많이 붙어 있다. 나와 같이 동그란 눈으로 들여다보던 쏨분이 몽족 문자라고 말했다. 자기는 읽을 줄 모르지만 어머니는 아실 거라고 아직 부엌에 계신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는 프랑스 문자라신다. 1950년대 찍은 사진이라고. 아버지는 1940년대라신다. 도대체 무얼까?

호기심이 발동한 내가 어머니께 부탁했다. 사진을 잠깐 빌려주십사 하고. 인터넷으로 프랑스어 사전을 찾아볼 수 있으니 내가 번역해 오겠다고 했다. 방으로 가져와 다시 자세히 봤다. 아무래도 불어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럼 베트남 문자인가? 페이스북에도 올렸다. 학식이 있는 아짠들한테도 물었다. 삐마이(라오스 새해) 1주일 동안을 탐문해 얻는 결론은 그 문자는 '여러 몽족들의 문자 중에 하나다'였다.

우리학교 아짠들 중에도 몽족이 있다. 영어 아짠이기도 한 아짠 '쌩마리'는 자기들 문자는 아니라고 했다. 아짠이 속한 몽족은 라오스어와 비슷한 문자를 쓴단다. 어떤 몽족은 한자와 비슷한 문자를 쓴다고도 했다. 문학과 라오스어를 가르치는 우리학교 교감선생님은 요즘 그걸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쏨분과 같은 몽족인 아짠 뚜무와(싸이냐부리 도교육청 대표다. 정치인이자 공무원이지만 존경의 의미를 담은 아짠으로 불린다)밖에 없을 거라고 귀띔해주었다.

어, 교육청장님도 몽족이었네! '선택받은 몽족'이 라오스에서 몽족이 심하게 차별받고 있다고 하는 선전을 완전히 믿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싸이냐부리 지방정부의 장들이 몽족이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싸이냐부리는 전 도지사가 몽족이었다. 지금 싸이냐부리 부군수도 몽족이다. 별로 힘이 없어 보일 것 같은 행정기관인 도교육국, 연구소의 라오스 지원활동을 도와주고 있는 도교육청은 최소한 싸이냐부리에서는 군수보다도 위상이 높다. 미처 해독하지 못한 쏨분 증조할머니 사진은 이렇게 내가 깨닫지 못했던 몽족의 비밀을 읽을 수 있게 해주었다.

아직 번역하지 못했노라 말하려고 쏨분 집을 다시 찾았다. 어릴 적 쏨분의 꿈(저개발 국가의 어린이들에게 장래 희망, 그들의 꿈을 묻는 것은 거의 금기다. 태반의 아이들이 자신의 미래를 꿈꿀 기회도 여력도 없을뿐더러 꿈의 실현은 절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은 컴퓨터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위양짠에서 기계수리를 배워서 집에 오토바이 수리를 주로 하는 가게를 냈는데 여전히 그림에도 관심이 많은 모양이다. 자신이 직접 만든 문양이라고 오토바이에 부착할 수 있게 만든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면서도 위양짠에서 공부하다 오토바이 사고로 얼굴을 다쳤다며 안 예쁘다고 사진 찍는 것은 극구 피한다. 아니다. 쏨분의 표정은 여전히 반짝거리고 미소는 내게 너무 눈부셨다.

/이영란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비상임연구원, <싸바이디 라오스> 저자

* 원문보기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57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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