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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12-15 12:18
[언론기사] [프레시안]사막에서 만든 전기로 인류 구원? 새빨간 거짓말!
 글쓴이 : 에정센…
조회 : 9,006  
사막에서 만든 전기로 인류 구원? 새빨간 거짓말!
[프레시안 books] 헤르만 셰어의 <에너지 명령>


이 책 <에너지 명령>(모명숙 옮김, 고즈윈 펴냄)은 유럽, 아니 전 세계 재생 에너지 산업의 아버지라고 불러도 무방할, 독일의 학자이자 전 연방의원이었던 헤르만 셰어(1944~2010년)의 유작이다. 2010년, 67세의 나이에 갑작스럽게 심장 질환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이 책에서 그는 화석 연료와 핵에너지에 기반을 둔 전통적인 에너지 세력들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리는 한 마리 야수와 같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셰어의 죽음은 지속 가능한 에너지 미래를 위해 함께 싸워 온 전 세계 동지들에게 큰 손실이다. 그래서 당연히 자신의 미래도 모른 채 돈벌이에 바쁜 화석 연료/핵에너지 산업에게는 가장 위협적인 존재 하나가 사라진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의 마지막 책이 늦지 않게 우리말로 번역되어 한국 독자들이 읽을 수 있게 되어서 반갑고 또 다행이다.

이 책의 제목 "에너지 명령(Der energetische Imperativ)"은 무슨 뜻인지 낯선 감이 있다. 셰어는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독일 화학자 빌헬름 오스트발트(1853~1932년)가 1912년에 출간한 책 제목에서 이름을 빌려 왔다. 오스트발트는 '에너지 명령'이 '네가 원하지 않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행하지 말라'와 같은 칸트의 정언 명령과 비교되지만, 이보다 더 우선된다고 주장했다.

칸트의 정언 명령이 사회적 공동생활의 품질을 결정하는 도덕률이라면, 에너지 명령은 그 사회의 생존을 좌우하는 '자연법칙'이다. 사회는 지속 불가능한 에너지인 화석 연료에서 벗어나 재생 가능 에너지―오스트발트의 용어로는 '상존하는 에너지'―에 근거해야만 한다는 현대 환경주의자의 주장을 이미 100여 년 전 독일 과학자가 에너지 명령이라는 자연법칙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셰어는 잊힌 오스트발트의 자연법칙을 기억에서 되살려내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죽는 그날까지 싸웠다. 그는 이 책에서 '바로 지금' 100퍼센트 재생 에너지로 독일이라는 한 국가, 나아가 전 세계의 에너지 시스템을 바뀌어야 하고 그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지금 존재하는 기술만으로도 이것이 가능하며, 화석 연료와 핵에너지에 기반을 둔 에너지 시스템에 비해서도 재생 에너지 시스템이 더 수지맞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시길. 그는 결코 공허한 이상주의자는 아니다. 그는 1980년부터 2005년까지 여덟 번이나 독일 연방의원을 지낸 독일 사회민주당 소속의 현실 정치인이었다. 그는 독일 재생 에너지 비중을 급격히 늘리는데 기여한 제도적 기반인 재생 에너지 기본법(2000년)을 만들어낸 장본인이었다. 이미 널리 알려진 바처럼 독일은 지난 20년간 재생 에너지를 통한 전력 생산이 급격히 증가했는데, 1990년 전체 비중 중 3퍼센트 비율에서 2010년 17퍼센트로 확대되었다. 독일을 이처럼 재생 에너지 분야에서 가장 앞선 국가로 만든 것은 재생 에너지로 생산된 전력을 고정된 가격으로 의무적으로 매입하도록 규정한 재생 에너지 기본법 덕분이었다. 그리고 이 법은 전 세계의 많은 국가들이 뒤따르고 있는 핵심 정책이 되고 있다.

▲ <에너지 명령>(헤르만 셰어 지음, 모명숙 옮김, 고즈윈 펴냄). ⓒ고즈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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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셰어에게 이런 성과는 안주할 만큼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어정쩡한 타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재생 에너지와 화석 연료 및 핵에너지 사이에 평화로운 공존이라는 것은 없으며, 어느 하나가 어느 하나를 제압하고 사라지도록 만들 수 있을 뿐이다. 그는 지금까지 전통적인 에너지 시스템의 옹호자들이 재생 에너지 주창자들을 무시하고 조롱해왔지만, 재생 에너지의 놀라운 성과 속에서 이제 이들은 그 행진을 지연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가 보기에, 중앙 집중화된 방식으로 에너지를 생산하여 공급해온 전통적인 에너지 시스템은 자신들의 구조를 보존하려는 다양한 방식을 동원하여, 지역 분산적인 성격의 재생 에너지의 확산을 저지해 왔다.

셰어에 따르면, 전통적인 에너지원에서 재생 에너지원으로 대체하는 것은 단지 에너지원의 변화만이 아니라 에너지원의 채굴 및 공급, 생산된 에너지의 전송 시스템과 같은 전반적인 물리적 구조부터 이를 운영하는 기업의 소유와 구조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법제도 기반까지 모두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의 에너지원에 적응하여 발전된 시스템은 다른 에너지원과 융합될 수 있으며, 혁명적으로 대체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인식은 미국 델라웨어 대학의 존 번 등이 2006년에 펴낸 <권력의 변형(Transforming Power)>에서 '질서있는 전환(orderly transition)'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면서 비판하는 상황을 떠오르게 한다. 실제로 기후 변화나 석유 생산 정점(Peak Oil)과 같은 에너지 위기의 해결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진 가운데, 기존의 에너지 기업들이 저탄소 에너지로의 전환을 표방하지만 여전히 중앙 집중화된 에너지 시스템을 포기하지 않은 채 핵에너지나 탄소 포집 저장(CCC) 기술의 활용에 기대를 걸면서 재생 에너지로의 전환은 최대한 늦추고 있다.

혹은 재생 에너지원의 확대를 일정한 수준으로 묶어두고 화석 연료와 핵에너지 중심의 중앙 집중화된 에너지 시스템의 속성을 유지하며, 심지어 데저텍(dersertec, desert+technology)과 같은 중앙 집중화된 거대한 프로젝트를 통해서 재생 에너지를 길들이려고 시도하고 있다. 이것은 타도되어야 할 구세력에 의한 '에너지 혁명'의 좌절인 것이다. 셰어가 보기에 100퍼센트 재생 에너지를 지금 당장 요구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이런 반동에 의해서 혁명은 좌절될 것이다.

혁명을 좌절시킬 수 있는 함정은 곳곳에 존재한다. 이미 언급한 핵에너지와 탄소 포집 저장 시설을 갖춘 석탄 화력 발전소는 비교적 쉽게 간파할 수 있지만, 데저텍과 같은 것들은 환경 운동 진영마저 혼란을 야기하는 것들이다. 데저텍은 햇볕이 뜨거운 북아프리카와 근동의 사막 지역에 집중형 태양열 발전소(햇볕으로 물을 끓여서 얻은 증기로 터빈을 돌려서 전기를 얻는다)를 비롯한 태양광 발전기, 풍력 발전기를 설치하고 이를 유럽 지역으로 직류 고압 전력망을 통해 전송한다는 구상이다. 2050년까지 유럽 전력의 15퍼센트를 이를 통해서 공급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일본의 손정의가 제기하고 문재인과 안철수가 언급함으로써 한국에서도 관심을 모았던 고비 사막에서 전기를 생산하고(Gobitec) 이를 연결하는 전력 연결망을 건설하자는 구상과 기본적으로는 같다. 그러나 가장 열정적인 재생 에너지 주창자인 셰어는 이런 데저텍을 "재생 가능 에너지의 발목을 잡는 우회로"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생각해 보라. 수천 킬로미터를 연결해야 하는 초고압 전력망을 계획한 일정 내에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그 과정에서 그 비용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국경을 넘는 전력망 건설을 시도한다고 하더라도 건설 구간 곳곳에서 있을 풀뿌리의 저항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국내의 밀양, 청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거센 저항은 가장 큰 장애물이 될 것이다.

셰어가 보기에 이런 저항과 지연은 당연하며 충분히 예상한 것이기 때문에 데저텍과 같은 구상은 바보 같은 짓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전통적인 화석 연료/핵에너지 기업에게 이런 구상은 반가운 일이며 심지어 기대했던 바일지도 모른다. 이런 구상이 실현된다면 이들 기업은 데저텍에 한 발 걸침으로써 중앙 집중화된 에너지 시스템에서의 지위를 여전히 유지할 수 있고, 안 되더라도―헤르만 셰어와 같은 이에게는 가망 없어 보이는―화석 연료나 핵에너지와 같은 기존의 에너지원을 계속 팔아가면서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지역 분산적인 재생 에너지 시스템의 성장은 정체되거나 심지어 퇴행할 것이다. 막대한 예산을 들여 건설된 전력망의 유지를 위해 분산적인 재생 에너지원 발전 시설에 대한 지원이 줄어들 수 있으며 심지어 제한당할 수도 있다. 100퍼센트 재생 에너지 자립을 하겠다고 선언한 99개의 독일 시·군에 대한 관심보다 데저텍에 대한 관심이 더 큰 상황은 이런 우려가 충분히 근거가 있음을 보여준다.

또 재생 에너지 기본법의 틀 내에서 소규모 분산적인 방식의 전력 생산에 대해 비약적인 투자가 이루어졌으며, 그것이 모두 수많은 중소기업으로 흘러들어갔다는 점까지 생각해보면, 대체 데저텍을 추진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이런 이유에서 셰어는 화석 에너지 기업과 손을 맞잡고 데저텍을 칭송하는 그린피스와 같은 환경 단체와도 맞서는 것을 피하지 않는다.

이단적으로 보이는 셰어의 접근은 여기에서 맞추지 않는다. 2009년 코페하겐 기후변화협약 총회에 대한 실망스러운 결과를 배경으로, 그는 왜 그러한 회의를 이어가는 것인지 의구심을 제기한다. 이는 단순히 실망의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냉철한 분석에 기반을 둔 것이다. 그가 보기에 기후변화협약을 둘러싼 국제 협상은 독일의 재생 에너지 기본법과 같은 획기적인 제도를 확산하기보다는 미심쩍은 배출권 거래제를 도입하면서 오히려 재생 에너지의 확대를 지연시키는데 기여하고 있다.

기후변화협약을 둘러싼 토론은 지구 평균 기온의 상승을 2100년까지 2도 이내로 묶는다는 터무니없이 보수적인 입장에서 이산화탄소를 포함한 온실 기체 배출 제한을 최소 수준으로 설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또 누군가의 감축이 누군가의 배출 증가로 이어질 수 있도록 설계된 배출권 거래제는 지구의 운명을 맡기기에는 너무나 한계가 명백한 제도다.

셰어는 이산화탄소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핵에너지나이나 탄소 포집 저장과 같은 잘못된 해결책이 스며드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기후변화협약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해, 재생 에너지의 확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강제적 의무를 부여하는 국제 조약을 만들기 위해서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기보다는, 온실 기체를 감축하는데 선도적인 노력을 보여주는 국가들의 발목을 잡는 일부터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헌다. 그의 논쟁적인 제안이 기후 변화를 막으려는 전 지구적 노력에 새로운 활력소가 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셰어는 전통적인 에너지 시스템으로부터 재생 에너지로의 전환 과정에서 가장 큰 걸림돌로서 지금도 사실상 독점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는 거대 에너지 기업들―이 책에서는 "에너지 콘체른"이라고 표현된다―을 부각한다. 화석 연료와 핵에너지에 기반을 둔 중앙 집중화된 에너지 시설과 거대한 전력망을 장악하고 있는 이들은 근본적으로 지역 분산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는 재생 에너지원과 화해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들을 극복하는 방법이 일부에서 얘기하는 자유화―한국적인 맥락에서는 민영화 혹은 사유화―일까? 셰어는 지역 단위의 공기업(시영 기업)이나 협동조합 등을 통해서 에너지 생산과 분배를 해야 지역 분산적인 속성을 가진 재생 에너지원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으며, 100퍼센트 재생 에너지 이용이라는 목표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한국 전력 시스템의 지속 가능성을 두고 민영화냐 공기업 유지냐는 이분법 이외에, 지역별 공기업으로 분할하는 방법에 관한 힌트를 던져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셰어는 이 짧은 서평에서 담기 힘들 만큼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또한 주목할 만한 구상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 모든 것을 의심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재생 에너지로의 전환을 '자연법칙'이라고 선언한 것이라든가, 재생 에너지의 고유한 특성(예를 들어 지역 분산적인 특성)이 그것을 담아내는 혹은 연결되는 에너지시스템 전체의 특성에 배태되고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전제하는 것은 지나치게 목적론적인 것처럼 보인다. 에너지 시스템 사이의 경쟁과 갈등을 에너지원 혹은 기술적 속성에 지나치게 환원하여 설명하는 대신, 이를 둘러싼 정치, 사회, 경제적인 이해관계의 갈등을 좀 더 주목하여 분석하였으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에너지 전환이라는 것이 새로운 기술의 잠재력이 마침내 발휘된 과학기술 혁명만으로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연대하여 지배적인 이해관계를 넘어 도달한 사회 혁명으로도 묘사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지금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좀 더 명확해지고 동기 부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번역하기 쉽지 않았을 셰어의 책을 한국어로 읽을 수 있도록 수고한 번역자에게 감사를 드린다. 그러나 번역에서 아쉬운 점이 여러 가지 있었다. 전반적으로 소위 '번역투'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어색한 문장들이 많아, 편안한 독서를 어렵게 했을 뿐만 아니라 뜻을 이해하기 곤란한 부분도 없지 않다. 게다가 번역어의 선택에 불만스러운 것도 상당히 있다.

예를 들어 핵심적인 개념인 '에너지 변화'와 '활동가'가 그렇다. 에너지 변화는 아마도 에너지 시스템의 변화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에너지 전환(energy transition)'이라는 용어를 선택하는 것이 더 적합해 보인다. 그리고 '활동가'는 통상 사회 운동에 직업적으로 참여하는 이들을 표현할 때 많이 사용하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이 책에서 사용되는 '활동가'라는 용어에는 기업, 정부 기구도 포함되는 것으로 파악되기 때문에 적절하지 않을 것 같다. 대신에 보다 중립적이고 포괄적인 용어인 '행위자'를 선택하면 어땠을까 싶다.

/ 한재각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부소장

* 원문 보기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21214143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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